과거의 복기와 그것을 넘어선 가능성 사이에서

고윤지


2024 KBS 가요대축제에서 가장 주목받은 장면은 단연 베이비복스의 무대였다. 1997년 데뷔해 2000년대 초반까지 활동한 1세대 K-pop 아이돌 베이비복스가 10여 년 만에 재결합해 데뷔곡 〈Get Up〉(1997)과 대표곡 〈우연〉(1997)을 재해석한 무대로 관객의 열광을 이끌어냈다. 댓글 창은 추억에 잠긴 감상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러한 열광 뒤에는 실제로 경험한 추억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서는 미묘한 괴리감이 도사린다.

베이비복스의 무대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한 추억의 복기를 넘어, 1세대 K-pop 아이돌이 동시대 청중과 호흡하며 새롭게 각색된 정체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이돌 산업의 초기 형성기를 함께하며 K-pop의 기반을 다졌던 그들이 2024년 신인 그룹들이 대거 활약하는 치열한 시장 환경 속에서도 관객의 열띤 호응을 끌어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들의 재결합 무대에는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이중적 매력이 존재한다. 30~40대 관객에게는 ‘내 청춘의 아이콘’으로, 10~20대에게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화코드’로 다가간다.

베이비복스가 2024년에 다시 활동을 지속한다는 소식은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재진행형 아티스트”라는 인식을 심는 동시에, 90년대 레트로 감성과 현대적 영상미가 공존하는 K-pop의 풍경을 체화하는 방식으로 읽힌다. 이들의 공연은 단순한 레트로 열풍을 넘어 과거와 현재의 문화적 코드가 중첩되는 현상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90년대식 발성법, 90년대 안무의 리믹스 버전, 당시에는 없던 -8K 영상, 음향 믹싱-기술과의 결합, 원곡의 멜로디를 재해석한 2024년식 프로덕션—이 모든 것이 “우리는 변했지만, 여전히 우리다”라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이는 뉴진스〈Ditto〉(2022)가 1990년대 일본 시티팝 샘플링으로 Z세대에게 '경험하지 않은 향수'를 제공하거나, 에스파〈Dreams Come True〉(2021)가 1998년 원곡의 집단적 희망 서사를 뉴잭스윙 리듬과 AI 아바타 음성으로 재편한 사례와 맥을 같이한다. 공통점은 역사적 맥락의 소거다. 일본 버블경제 붕괴나 한국의 IMF 위기 같은 시대적 트라우마 대신 '90년대 미학'이라는 감각적 기표-빈티지 필터, 유토피아적 멜랑콜리-만이 추출되어 재탄생된다.

미국의 문화 평론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그의 저작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에서 포스트모던 사회가 역사성의 상실 속에서 과거 스타일을 무작위 차용하는 '페이스트(pastiche)'를 생산한다고 지적했다.

베이비복스의 무대는 90년대 집단적 희망 서사를 신자유주의 구조 조정과 IMF 위기라는 역사적 모순으로부터 분리시켜 감정적 기표로 전유한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영국의 비평가 마크 피셔가 그의 저작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언급한 "과거 재활용이 미래 상실을 은폐하는 자본주의 전략"과 맞닿는다. 레트로 열풍은 역사적 총체성을 분해해 알고리즘 친화적 조각으로 재포장함으로써 향수를 예측 가능한 수요 곡선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에스파〈Dreams Come True〉가 40대에게는 IMF 시대의 '유토피아'로, 10대에게는 메타버스에서의 '개인적 자유'로 해석되듯, 세대 간 공감대 형성이라는 역설적 가능성을 내포한다.

2023년 그래미상 대중음악 분야 후보 중 약 60%가 리메이크 또는 샘플링된 곡이었듯, ‘레트로’는 흥행 보증수표로 자리 잡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체험하지 않은 과거에 공감한 Z세대의 존재다. 베이비복스가 활동했던 1990년대 후반은 IMF 외환 위기 이후 구조 조정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신자유주의적 변화가 본격화하던 과도기였다. 당시 사회는 실업률 증가와 비정규직 확산 등 2010년대까지 이어질 문제들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음에도, 문화적 측면에서 '극복의 서사'가 강조되며 집단적 동질감이 형성되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반면 현재 청년 세대는 끝없는 경쟁과 불투명한 미래에 직면해 있다. 90~00년대의 경쾌한 댄스 음악은 "과거에는 희망이 존재했다"는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현실을 견디는 정신적 버팀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마크 피셔『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신자유주의는 문화적 기억을 자본의 순환 가능한 단위로 재편하는데, 이는 창의성의 고갈이 아니라 체제 유지를 위한 고의적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과거의 아이콘을 재활용하는 레트로 열풍이 '미래의 상실'을 정상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베이비복스의 재결합이 "'검증된 향수'라는 시장 논리에 포획된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문제는 추억 마케팅이 ‘현실 변화’ 대신 ‘과거 도피’를 정당화할 위험성이다. 낭만화된 추억 소비는 위기 시대의 진통제이자 신자유주의가 낳은 무기력함의 증거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아이러니는 ‘희망의 90년대’ 이미지 자체가 당시의 암울한 사회 구조를 은폐하는 허구라는 점이다. IMF 위기, 세대 갈등, 성차별적 구조 속에서도 버텨낸 그 시절이 황금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리즘에 분절된 개인들은 이런 향수를 자극하는 음악들을 통해 연결 욕구를 채운다. 최근 K-pop 리메이크 열풍은 단순한 추억 마케팅을 넘어 체험하지 않은 시대에 대한 젊은 세대의 재해석 욕망을 반영한다. 원곡이 가진 역사적 맥락이 재편되며, 〈Dreams Come True〉와 같은 곡은 IMF 세대의 집단적 트라우마가 팬데믹 세대의 개인화된 불안으로 변주된다. 이는 자본의 추억 상품화 논리를 드러내는 동시에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음악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역설적 지점을 만들어낸다. 공식 무대 영상 댓글 창에 '엄마와 처음으로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했다'는 10대의 기록처럼, 알고리즘이 주도한 향수 소비가 세대 간 대화의 계기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마크 피셔『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언급한 "구조적 염세주의"의 틀 안에서도, 리듬이 촉발하는 공동체적 몸짓은 여전히 저항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제임슨이 경고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성 상실’, 마크 피셔가 지적한 '자본사실주의'의 맹위는 여전히 우리 시대를 가로지른다. 그러나 과거의 리듬이 디지털 시대의 박자와 충돌하는 순간, 알고리즘이 만든 개인의 분절과 격리감을 일시적으로라도 붕괴시키는 공명이 발생한다. 이는 단순한 향수 상품화를 넘어 세대를 관통하는 구조적 부재에 공동으로 맞서는 몸짓이다. 트라우마의 재현이 아닌 재구성을 통해 개별적 추억이 집단적 기억으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저항'의 새로움이 빛난다. 자본의 논리가 모든 공백을 점령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그 틈새에서 공유된 박자로 서로의 맥박을 확인하고 있었다. 역사화 되지 않은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박자의 간격 속에서 우리는 침묵하지 않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인용 및 참고

-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번역, 문학과 지성사, 2023. 『보이는 것의 날인』, 남인영 역, 한나래, 2003.

- 마크 피셔(Mark Fisher), 『자본주의 리얼리즘』박진철 역, 리시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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