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s in my playlist?
Bokeh를 발견하는 새로운 관측법을 제시한다.
고윤지
늘 새로운 음악이 궁금하다. 진득이 한 가지 노래를 듣기보다 새로운 것 없나 서핑하고 있는 나는 음악 플랫폼 계정마저도 ‘취향 알 수 없음’이 여실히 보인다. 그럼에도 유독 애정가는 트랙들로 플레이리스트를 꽉꽉 채워보았다. 그 트랙들은 나의 이야길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고심한 끝에 첫 트랙은 Blerta의 ⟨ Dance all Around The World ⟩로 정했다. 유랑하는 음악 서퍼 기질에도 이 곡은 언제나 내 플레이리스트 최상단에 위치한다. 이유라면 1’55”쯤부터 이어지는 Bill Stalkerd의 구어 방백(또는 독백)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곡을 처음 들은 날, “(가사)And so they danced, until they came to a beautiful castle on a lonely hill“로 시작하는 방백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듯했다.
“소리가 무대가 될 수 있다 음악이 극적인 사건이 될 수 있다 풍경이 텍스트가 될 수 있다 ”
서핑하다 얻어걸린 노래 한 곡으로 음악의 ‘극적인‘ 순간을 발견했던 것—Theatrical Rock이라는 장르에 걸맞게도—이다. 그 경험은 굉장히 값졌다. 음악을 듣는다는 건 일상적 활동에서의 적막을 '즐거운 소음'으로 채우는 것쯤이라는 생각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이다. 나에게 더이상 음악은 즐거운 소음만이 아니다. 그 이상을 초월하는 것이 되었다. 나에게 음악은 그렇다. ⟨ Dance all Around The World ⟩가 나에게 준 발견처럼, 더 많은 경험들에 마주 하기 위해 언제나 들을 것이다. 더 많이 들을 것이다. ♪(´∇`*) ♫ ♪
김원길
왠지 이건 진실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씩씩한 노동자이자 명랑한 소비자로 길러졌지만, 인생이 결론적으로 슬플 것이라는 예감은 홀연히 찾아들었다. "막 슬픔이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심보선 시인의 작품 '슬픔이 없는 십오 초'의 구절이다. 따듯한 부모 품을 떠나 비틀비틀 서게 된 순간 확신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고, 이런 곳에서는 누구나 춥고 어두운 우물에 빠질 것이라고. 그럼에도 나는 대체로 씩씩하고 명랑하게 산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예쁜 가게에 간다. 학점도 적당히 챙기고 스펙 관리를 한다. 바쁘고 명랑하게 살다보면 슬플 시간이 없다. 대신 이런 시대를 꼼꼼히 슬퍼해주는 음악을 듣는다. 편지에 적을 수 없는 마음을 가만가만 적어낸 노랫말을 좋아한다. 연인과 맞잡은 두 손에 들어찬 슬픈 직감, 별들이 결국 사라지기에 인생도 허무한 것이라는 생각. 부조리한 구조를 고발하고, 우리가 더 나은 관계로 만날 수 있다고 노래하는 음악들을 찾아 듣는다. 그러고 보니,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슬
언젠가부터 좋음에 대해 설명하기 어렵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을 때도 그냥 좋다. 이유를 떠올리기 전에, 기준 조차 퇴색되어 세상이 잿빛처럼 느껴질때가 왕왕 있다.
이번 플레이리스트는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노래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어쩌면 삶의 연대기라고 할수도 있겠다. 필연적인 외로움과 그로 인한 지겨운 삶의 연속, 행복이란 거시적인 단어 앞에 늘 움츠러들지만 누구보다 함께 이를 나눌 사람을 찾고, 커다란 그늘은 걷히지 않지만, 그 밑에서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주는 이들과 함께하는. 여러 색이 합쳐지면 잿빛이 되는 것처럼, 다채로운 삶의 레이어 속 나는, 반짝이는 순간을 믿는다.
양지원
(1) 대학생이세요? 아니요. 그럼 직장인이신가요? 아니요.. 아주 쉬운 질문들에 할 말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 나와 비슷하다 느껴지는 노래들을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대학생은 아니지만 사진을 배우려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직장인은 아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고 있습니다. 겨우 감당하며 일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가 요즘 고민이고 하고 싶은 것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고 싶은 건 있는데 그걸 어떻게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디자인을 좀 더 집중해서 해보고 싶습니다. 돈 걱정보다 재미가 더 큰 취미를 만들고 싶습니다. 꼭 취미만이 아니라 흥미가 생기는 것들을 배울 때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쭉 노래 듣는 것을 좋아해왔고 굳이 따지자면 인디로 분류되는 음악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또 전자음이 들어간 음악이나 영화나 영상 속에서 존재감을 나타내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2) 자주 슬퍼지는 사람이라 그런지 웃긴 것이 좋습니다 - 덤덤하게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 알고보면 그리 이상한 말도 아닌 것이 웃깁니다 - 그럼에도 너무 이상해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 누군지 모를 사람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 그러다 조금 알 것 같아서 슬퍼지는 일도 있습니다
윤
우리에겐 사운드 트랙이 필요하다. 자기만의 사운드 트랙이. 나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조금 곤란하니까. 그럴 땐 좋아하는 음악을 이야기하는 걸로 내 모든 것이 간단히 설명되었으면 좋겠다. 마치 유선 이어폰의 한 쪽을 건네줄 때처럼.
음악에 생활을 투영할 때가 많다. 의미를 찾기보다는 단순히 즐겁기 위해서. 그것은 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 듣거나 읽을 때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사운드 트랙을 생각해본다. 유선 이어폰을 나눠 꼈던 일들을 떠올려본다. 한 쪽 귀에서만 재생되던 소리는 공기에 파편처럼 흩어지고 흐려져서 이내 음량을 조금 올린다. 잘 들리나요?
재영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이 자문으로부터 글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지만, 물음은 어느새 흐릿해진 것 같다. 답을 내리려고 하면 할수록, 취향은 완성되는 법이 없는 것 같달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서인지, 좋아하는 곡은 많지만 사랑하는 곡은 늘… 답이 안 나오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나를 길 잃게 하는 것들. 누군가에게 이 곡은 이런 음악이에요, 하고 간단히 소개하기 조금 곤란한 것들. 이 짧은 글은 그저 그 곤란함에 대한 작은 토로에 불과할지도, 그 무엇도 소개하지 않는 엉터리 소개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곤란함을 안고 살아간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여기에는 다만 내가 사랑하는 소리들을 적었다. 여름밤의 고물 선풍기가 내는 소음에 어울리는 소리, 간밤 쌓인 눈에 아직 인간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아침이면 더 잘 들리는 소리. 지금은 멀리 떠난 친구와 나누어 듣던 소리. 겨우 그런 소리들이, 지금도 나를 스치고 있다.
22
‘백구를 안고 돌아와 뒷동산을 헤매이다가 빨갛게 핀 맨드라미 꽃 그 곁에 묻어주었지.’
나는 자주 숨어 우는 학생이었다.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야자를 짼 날엔, 버스 차창에 기대어 누구의 방해없이 슬픈 기분을 만끽했다. 이상한 안정감에 도취되었던 어린 얼굴은 습기 찬 버스 창문 안에 숨었고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버스에 내려서도 음악이 끝나기 전까지, 그 다음 그 다음 음악까지 듣기 위해서 동네를 몇바퀴 더 돌았고 핸드폰이 꺼지고 나서야 집에 돌아갔다.
선명하고 빈 공간없이 가득 채워진 음악들은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양희은, 송창식의 음악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음악을 꼭 리마스터링 버전이 아닌 옛날 녹음본으로 찾아 들었다. 국어책에서나 볼법한 시적인 가사와 아날로그 음원 속 노이즈에 날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할퀴지 않는 음악, 나는 거기에서 숨쉴 구멍을 찾았다.
새벽에는 사이버 세계를 유영하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 헤맸다.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와 얀얀막 감독의 <butterfly>가 친구가 되어줬고 친구와 얘기하는 것마냥 사운드 트랙을 들어댔다. 그 중 모임별과 Múm은 알게된 건 그 당시 나에게 어떤 사건과도 같다.
나는 이제 울고 싶어도 눈물이 잘 나오지 않는 버썩 마른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같은 음악을 듣고 있고 또 자주 숨는다. 나는 이 음악들로 언젠가의 시간을 감각한다. 플레이는 계속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