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에테르를 찾아서

BOKEH의 기획 특집 [우리의 에테르를 찾아서]에서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등장하는 심상, '에테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기획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시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에테르'를 파고 들어 '우리 안의 에테르'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보다 매끄러운 진행을 위해 소설과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부분적인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본 기획의 제목은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의 토속 민요들을 소개 해 온 MBC 라디오의 프로그램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와 웹진 [weiv]에서 연재 되었던 포스트록 칼럼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아서>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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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BOKEH 》

우리의 에테르를 찾아서 첫 번째 이야기

내가 말했잖아 너를 데려간다고

너의 아픔들은 이제 없을거라고

 서태지의 <Take One>은 이런 가사로 시작한다. 이 가사의 초월성을 좋아한다. 앨범 전체의 입을 떼는 이 최초의 메시지는 가장 탁월한 첫 마디일 것이고 그것이 내게는 단순한 구원처럼 보이진 않는다. 구원자가 외부 세계에 존재할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간도, 신도 아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외계인에 가까운 그런 존재. 그런 존재만을 믿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미지의 것에 의해 구해지기를 기도한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에 등장하는 ‘릴리슈슈’의 존재와 음악이 그렇다. [우리의 에테르를 찾아서]에서는 작중 ‘릴리 슈슈’의 팬 사이트 릴리필리아 속에서 투고를 하는 기분으로 이야기 나눠보려고 한다.

닫혀진 사고의 해방. 그녀는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다. 릴리가 ‘에테르’ 속에 밀어 넣은 그림자. 그것은 파장을 승화시키며, 가시광선을 넘어 투명보다 더 깊은 영역에 도달한다. 투명성이 있는 아픔의 이미지는 세로토닌의 틈새를 채워 준다. ​
《 작성자 : 코르네아 》 ​

나의 아픔은 ‘에테르’에 의해 치유된다. ​
《 작성자 : 유메코 》 ​

나에게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친구이기도 하고, 부모이거나, 애인이거나, 하지만 그것에 의해 상처받는 일은 많이 있다. 모두 그것을 참고 살아간다. 그래서 이 ‘에테르’가 있다. 편안함과 영원의 장소, 그것이 ‘에테르’. ​
《 작성자 : 레스폴 》 ​

릴리에게는 보이고 있겠지요.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것이 ‘에테르’라면, 릴리를 들을 수 밖에 없어.
《 작성자 : 아이스 》

그래서 '에테르' 라는 게 뭔데? ​
《 작성자 : Free Bird 》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발췌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상욱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하 <릴리 슈슈>)에 대한 감상부터 이야기 해 보자. 

나는 10대 후반에 이 영화를 봤는데, 그때는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들에게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당연히 똑같은 경험은 아니겠지만 학창시절을 힘들게 보냈던 사람들이 열광할만한 요소들이 있는 영화다. 그 시절의 ‘끔찍한’ 디테일들.

 지금 봤으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 시절에 봐서 기억에 남고 좋아하는 영화가 되지 않았나 싶다. 지금 보면 너무 우울하고(웃음), 영화적으로는 그렇게 특별하진 않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 힘들었던 내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릴리 슈슈의 노래를 들으며 등장인물들이 위로를 받는 것처럼, 나도 영화를 보고 릴리 슈슈의 음악을 찾아 들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상욱  나는 <릴리 슈슈>를 20대 중반 즈음에 처음 봤는데, 그래서 그런지 (10대 때 영화를 본) 윤과는 다르게 큰 감흥을 받진 못했다. 그러나 이와이 슌지 감독이 어떤 불안정한 관계와 시기를 그려내는 데 아주 탁월한 감독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감독의 모든 필모그래피를 섭렵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의 대표작인 <러브 레터>를 볼 때도 관계의 변화 속의 불안정한 개인의 심리와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모호한 불안감들을 스크린에 잘 담아내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불안정한 성장 과정 속 극단적인 감정이 쌓이고 쌓이다 인물 간의 갈등들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터져버리는 순간들이 인상 깊었다. 아무도 서로의 말을 안 듣고 아무도 서로를 안 믿어주고…

영화 자체는 2020년대 들어서 인기가 더 많아진 것 같다. 이전에는 매니아 층이 확실한, 좀 컬트적인 인기가 있는 영화였는데 요새는 흔히 말하는 ‘힙스터’ 문화 전반의 향유물이 되었다. 5-6년 전 ‘힙스터’ 문화에서 검정치마가 가지고 있던 아이코닉한 이미지가 이제는 <릴리 슈슈>로 넘어오지 않았나(웃음).

상욱  그런 유행의 변화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배경 중 하나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라는 점에서 한국의 인디 음악 팬들이 디테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은 것도 한 몫 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사회/문화적인 분위기가 어느정도 비슷해서 그런 요소들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도 쉬웠고.

파란노을의 정규 2집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이 좋은 평을 받은 것도 <릴리 슈슈>가 다시 많은 관심을 받게 된 큰 이유 하나였다. 당장 앨범의 첫 트랙 <아름다운 세상>의 시작부터 <릴리 슈슈>의 대사 (“뭐 듣고 있어?” “릴리 슈슈”)를 삽입했고, 앨범 소개에서도 <신세기 에반게리온>, <잘 자, 푼푼>, <NHK에 어서오세요>와 함께 <릴리 슈슈>를 언급하며 자신이 2000년대 초반의 서브컬쳐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고. 물론 파란노을의 음악적 성과가 명확하게 드러났기에 의미가 있었다.

상욱  앞서 말한 2000년대의 서브컬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잘 자, 푼푼>이나 <릴리 슈슈>같은 작품들이 ‘힙스터’들에게 언급되는 빈도를 파란노을의 2집 발매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이 기존 작품의 코어 팬들에게는 어쩌면 좀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웃음),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의 발매가 ‘힙스터’ 문화 전반에 이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심상인 ‘소외되고 변화 속에서 갈등을 겪는 개인’을 퍼트리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미완의 노스텔지어

파란노을 정규 2집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상욱  작중 ‘에테르’라는 요소가 릴리 슈슈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릴리 슈슈의 음악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다뤄진다. 영화 속 커뮤니티에서 팬들도 릴리 슈슈의 디스코그래피를 이야기 하면서 “이런 음악은 에테르가 없다”, “이런 음악은 에테르가 있다” 이런 식으로 토론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한국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파란노을의 2집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의 흥행 이후 인터넷 커뮤니티, 특히 SNS 등지에서 어떤 음악을 소개하거나 설명할 때 ‘에테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주로 좋은 평가를 할 때 “에테르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에테르’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 한번 말해보자.

윤: 먼저 ‘에테르’는 어떤 장르나 음악에 사용된 테크닉이나 장르를 떠나 곡 전반에 깔린 특정한 심상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코어’라고 말하는 창작물의 기반이 되는 정서나 문화 중 하나가 ‘에테르’다.

상욱  카리스마의 대용어로 흔히들 쓰는 은어인 ‘야마’랑 비슷한 느낌도 있고(웃음). 재미있는 점은 굉장히 다양한 창작물에 ‘에테르’가 있다는 평가를 하는데 어떤 기준점이라고 할 만한 공통적인 요소들이 있을지 정리해보고 싶다.

(심상은) 아무래도 주관적이고 개인의 감상과 기억에 긴밀하게 결부 되어 있는 것이지 않나. 객관적인 수치나 명확한 요소를 뚜렷하게 말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런 만큼 ‘에테르’라는 용어가 장르와는 별개로 공통의 심상이 느껴진다면 다양한 곳에 사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상욱  동의한다. ‘에테르’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을 보면 어떠한 기준이 있는 요소가 아닌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기세’같은 것에 가까운 것 같다. 창작자의 뿌리에서 오는 힘이라고 해야 하나. 이건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가(웃음).

어떤 공통적인 점이 있다면, 주로 특정한 시기의 노스텔지어가 느껴지는 음악에서 ‘에테르’를 느낀다고 많이 말하는 것 같다. 에테르는 개인의 노스텔지어를 기반으로 한 심상이라고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상욱  그럴 수도 있겠다. 한국과 일본의 사회문화적 환경이 비슷하니 ‘에테르’의 개념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특히나 학창시절의 기억, 혹은 트라우마가 비슷하지 않나.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의 청소년들이 스트레스를 연속적으로 크게 받는 상황에 다년간 놓여있는 환경이 양국 모두에게 있으니까. 그리고 고통스러운 시기가 지나간 이후에는 그것이 미화되어 어떤 추억처럼 기억되는 일도 잦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보통 안정적이고 일상적인 편안함을 주는 창작물을 ‘에테르’가 있다고 느끼지는 않지.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세수를 하는, 이런 일상적인 행동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안정적인 것들은 그것이 사라졌을 때 안정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그런 면이 일상적인 안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 어렵게 한다.

상욱  일상이 무너질 때 생기는 혼란스러운 시기, 혹은 일상이 비일상이 되거나 비일상의 일상이 되어 버리는 격동의 시기에서 느끼는 정신적, 환경적 ‘위태로움’에서 ‘에테르’를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

상욱  조금은 다른 이야기인데, ‘에테르’를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노스텔지어라는 점에서 영국의 음악인들은 왜 이렇게 우울한 음악을 많이 만드냐는 질문을 받은 기억이 난다(웃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때마다 이미 식민 지배로 얻어낸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시대가 한참 지나가 그 이후에는 아무리 행복해도 그때 같을 수 없을 거라는 무력감이 사회 전반에 자리 잡은 게 아니겠냐고 답한다. 이 말대로 라면 그건 착취의 업보겠지만(웃음).

최근 한국의 음악인들에게서 영국의 80-90년대 음악인들의 작품에 묻어 있는 세대 전반의 무력감과 우울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한국도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했던 국가고, 그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하면 된다’ 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 아래 갈려 나가지 않았나. 이제는 그 반동이 찾아온 게 아닌가 싶다.

밝은 시대를 그리워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그 시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압축한 시티팝 같은 음악이 유행하고, 결국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허무해진다. 필연적으로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흐름이다. 그 과정에서 ‘에테르’적인 작품이 생기는 건 보다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기억들이 함께 해야 하는, 약간은 다른 이야기지만 이러한 흐름 자체는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오래도록 반복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노스텔지어는 기본적으로 불안정한 감정이다. 결국 돌아갈 수도 없고 다시 재현되지도 못할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안정하다. 음악과 패션의 유행은 비슷한 궤적으로 돌고 돌지 않나. 지금은 조금 열기가 식었지만 Y2K가 작년 한 해 엄청나게 뜨거운 유행이었다. 나는 이것이 사람들의 거대한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내가 한참 불행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중학생 때는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간절했던 것 같다. 딱 1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생각과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 우울했다. 그래서 그 시절에 일부러 옛날 영화나 옛날 음악들을 많이 들으며 현실 도피를 했는데, Y2K 유행이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느꼈다.

상욱  그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Y2K 유행이 이해는 된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처럼 낭만적인 일이 범국가적으로 있었던 시기니까. 그리고 여러모로 다양한 문화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기도 했다. 일본 80년대 버블 경제 시기의 풍요로운 시대상이 담긴 시티팝처럼, 한국인들에게는 Y2K가 풍요롭고 낭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유행은 나의 기분과 상관 없이 오고 가고, Y2K는 요즘 유행에서 그려지는 것만큼 낭만적인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늘 한다.

앞서 말했듯이 노스텔지어는 굉장히 많은 것을 미화한다. 낭만이 없던 시기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보다 특별히 좋은 시기도 아니었다. 좋은 마케팅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갖고 싶어서 파는 것이 아니라, 팔고 있어서 갖고 싶어진 대표적인 상품이 아닌가…

어떤 시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사실 그 시기가 실제로 어땠는지, 사실과는 큰 관련이 없는 기분이다. 나아질 곳이 없으니까 자꾸 옛날의 괜찮았던 순간들을 환기 시키고 곱씹는 거지.

항상 에테르 영화로 언급하는 <고양이를 부탁해>가 생각난다. 2001년에 개봉한 영화인데, 딱 아날로그랑 디지털의 사이의 시대를 그린, 세기말에서 밀레니엄으로 넘어가는 시대의 혼란스러움이 느껴진다.

상욱  나는 영화를 하나 꼽아 보라면 왕가위 감독의 <타락천사>가 ‘에테르’적 요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론적인 이야기로 이를 설명 하긴 어렵겠지만 이야기가 불안하게 이어지는 와중에 한 컷 한 컷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답게 찍혔다.

앞서 말한 <잘 자, 푼푼>에서 동화적인 분위기와 나레이션으로 세상에서 끊임없이 겉도는 개인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려내지 않았나. 그와 비슷한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다.

 역시 불안정한 상황에서 ‘에테르’를 느끼게 된다(웃음). ‘에테르’가 담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지나치다 느껴질 만큼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상욱  사실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할 줄 알고 준비 해 왔는데(웃음), 나는 모임 별의 음악에서 ‘에테르’를 느낀다. 윤이 말한 <고양이를 부탁해>에 모임 별이 음악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니 둘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면이 있네. 나도 모임 별이 방금 말한 지나칠 만큼 환상적인 이미지를 준다는 점에서 ‘에테르’를 느꼈던 것 같다.

모임 별의 정규 1집 <아편굴 처녀가 들려준 이야기>

 노스텔지어는 아무래도 좀 과장되어 아름답게 느껴지는 면이 있지 않나. 최근에 닌텐도 DS를 다시 켜서 <놀러오세요 동물의 숲>을 실행했을 때 메인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나를 순식간에 어린 시절로 데려가는 경험을 했다.

아무래도 추억은 개개인의 편차가 클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는 ‘에테르’가 있다” 고 말하는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동시대를 살아가며 보편적으로 하게 되는 경험들이 만든 현상 아닐까.

상욱  그렇지. 나도 닌텐도 DS를 통해 비슷한 경험을 종종 한다.

 가령 음악에서는 관악청년포크협의회에서 ‘에테르’를 느낀다.

상욱  브로콜리너마저는? 비슷한 감각의 밴드 아닌가.

 아니. 브로콜리너마저는 노스텔지어가 있지만 ‘에테르’는 아니다. 너무 단호했나? (웃음) 하지만 노스텔지어가 ‘에테르’가 되려면 돌아갈 수 없는 시기에 대한 슬픔이나 더 나아질 것이 없다는 허무함이 함께해야 한다.

상욱  이해했다. 관악청년포크협의회의 그린티 바나나와 브로콜리너마저의 윤덕원은 같은 사람이지만 <밤새> 같은 곡의 슬픔은 분명히 브로콜리너마저가 노래하는 슬픔과 다른 종류의 감정이다.

비슷한 예시로, 나는 Achime의 음악에서 노스텔지어를 느끼지만 ‘에테르’를 느끼진 않는다. Achime의 음악들은 지나간 젊음을 노래하기도 하고(<Pathetic Sight>), 종종 자기파괴적이기도 하고 허무한 순간을 노래하기도 하지만(<불꽃놀이>) 그 와중에 늘 ‘내일’이 있다는 게 느껴진다.

 정리하자면, ‘에테르’는 노스텔지어를 바탕으로 한 심상이고, 바탕이 되는 노스텔지어는 단순히 추억 뿐만 아니라 그 시간으로 돌아 갈 수 없다는 현실에서 오는 고통과 허무함이 함께해야 한다. 우리는 ‘에테르’를 늘 느끼며 사는 셈이지(웃음).

상욱  그렇다면 그 노스탤지어는 현실의 어떤 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고, 어떤 흐름을 통해 우리에게 슬픔과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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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나원영 》

두 번째 이야기


상욱  먼저, BOKEH의 독자들에게 간단한 소개와 인사 부탁 드린다.

나원영(이하 ‘원영’) 2016년부터 대중음악 비평가로 활동 중인 나원영이다. 〈우리의 포스트 록을 찾아서〉〈대체 현실 유령〉을 썼고, 최근에 「우리의 포스트-록을 이해하길 멈출 때」라는 글을 발표했다. 잘 부탁 드린다.

「우리의 포스트-록을 이해하길 멈출 때」 는 문학과사회 하이픈(2024년 여름)에서 읽어 볼 수 있다.

상욱  먼저, 이번 기획의 주제인 ‘에테르’가 나온 영화, 〈릴리 슈슈〉에 대한 감상이 궁금하다.

원영  사실 〈릴리 슈슈〉가 나에게는 좀 보편적인 교양 같은 영화라고 느껴졌는데, 내가 보편교양을 잘 안 챙겨보는 타입이다(웃음). 그래서 항상 미루다가 대담 일정이 정해지고 나서 봤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는 점이 많았다.

 특히 오키나와 여행 장면 등에서 핸드헬드로도 두드러지는 영상의 빛 번짐 같은 요소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듯한 질감이 많이 느껴졌는데, 그런 기술적 요소들이 현대의 우리가 창작물에서 흔히 말하는 Y2K 감성이나 2000년대의 노스탤지어를 떠올리게 하는 것에 큰 영향을 끼치는것 같다. <릴리 슈슈>가 이제 사람들에게 어떤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그런 기술적 요소가 현재의 관객들에게 와닿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한 기술적, 디지털적 요소들이 영화 내에서 어떻게 시각적으로 드러나는지 살펴보는 것도 영화의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작품 초반 온라인 채팅창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표현할 때에는 실제로 컴퓨터에 접속을 하고, 마우스를 움직이고, 타자를 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텅 빈 검은 화면에 〈매트릭스〉처럼 글리치 섞인 자막으로 처리한 채팅들이 마구 뜨는 방식으로 연출한 것처럼.

 그렇게 굉장히 추상적인 형태로 인터넷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 안의 공간을 현실과 상관없는 가상의 세계, 혹은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그리겠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그랬기에 릴리 슈슈를 좋아하는 마음을 따라 모두가 인터넷에서 만났지만 결국 흩어지고 무너지며 결말의 그 사단이 난 것이 아닐까 싶고... 그런 점에서 나는 <릴리 슈슈>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 파란 하늘 아래의 푸른 논에서 홀로 이어폰을 끼고 음악 듣다가 막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아주 인상 깊었다. 같은 것을 좋아하지만 함께하지는 못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 장면이니까.

 결국 모든 등장인물들이 릴리 슈슈를 좋아하지만 자기 멋대로 듣고 자기 멋대로 생각을 하다보니 다들 더 외로워지고...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설득력을 가진다. 현실에서 좀 덜 외롭고 싶어 온라인 속으로 도피해 보았지만 거기에서도 외로움은 똑같이 느껴지는, 그렇게 돌고 도는 현실이 흥미로웠다.


한국적 '에테르'

 이번 기획을 시작하면서 한국의 에테르에 대해 고민을 했다. ‘한국에도 ‘에테르’라는 특정한 정서가 존재할까? 그렇다면 그건 무엇이고 어디에서, 어떤 과정으로 발현될까?’

원영  요새에 그런 2022년의 과정들을 복기 해 보는 것 같다. 2021년 초에 파란노을의 2집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이 발매되고 한창 주목을 받으며 RYM 인터뷰도 나오고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워졌을 즈음 아시안글로우처럼 웹 상의 슈게이징·이모 음악가들이 여럿 등장하며 데뷔 음반이 많은 관심을 받았고, 2022년 5월에 브로큰티스의 온스테이지 영상이 올라오고 몇 달 뒤 당시 크게 주목받은 아티스트들이 함께한 기획공연 〈Digital Dawn〉이 열리지 않았나. 그 일련의 과정은 온라인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사실은 현실에도 존재하고 현실에서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상욱  브로큰티스의 온스테이지 무대를 보고 문화의 흐름이 달라져 생긴 변화가 어느새 우리 앞에 다가왔다고 느껴졌다. 사운드클라우드의 슈게이징 씬에서 활발하게 음악을 만들던 아티스트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넘어 청자들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

〈DIGITAL DAWN〉

원영  한국의 에테르라고 하면 이런 디지털에서 출발해서 오프라인의 현장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오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한국의 서브컬쳐들이 대부분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나.

 90년대에 대해 찾아봐도 PC 통신 속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만나 장르 음악의 영역에서 컴필레이션 음반을 만들고, 레이블을 만들었다. 인디 록뿐만 아니라 전자음악 씬의 사람들도 그런 방식으로 〈Techno@kr〉〈PLUR〉 컴필레이션 앨범을 냈고, 힙합도 하이텔에서 서로 이야기 나누던 사람들이 모여 〈BLEX - 검은 소리〉 같은 컴필 앨범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들이 2000년대까지 음악 장르 음악 씬을 견인했다. 그 이후로는 나의머리카락뭉치, 500원 프로젝트 같은 아티스트들이 활동하던 밀림 닷컴이 있었고, 더 시간이 지나서는 사운드클라우드 같은 전세계인들이 애용하는 사이트까지 생겼다. 이렇게 인터넷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창작자들이 커뮤니티와 홍대 사이를 오가며 서브컬쳐 씬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한국에서 90년대 후반부터 유행했던 하위 장르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인디 씬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홍대의 어떤 공연장에서 언제 모여서 무엇을 했다, 이런 물리적인 현장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기반 중 하나가 인터넷 커뮤니티라고 생각한다. 이를 같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한국에서의 에테르가 어떻게 흐르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주류 가요에는 속하지 않을 여러 장르 음악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하나의 씬으로 삼고 자라난다는 점이 한국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겪어보지 않은 과거에서 오는 노스탤지어가 에테르를 만드는 큰 요소 중 하나라고 언급했는데, 이처럼 사라진 인터넷 커뮤니티나 직접 보지 못한 밴드와 그 밴드들이 활동하던 시기를 글과 영상으로 접할 때에도 경험해본 적 없는 시대와 환경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느끼게 된다.

원영  나도 돌이켜보면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아서〉에서 다루었던 밴드들을 대부분 당시에 실시간으로 따라잡거나 직접 공연을 보면서 들은 것은 아니다. 글을 쓸 시점에는 거의 대부분의 밴드가 활동을 중단한 상태였고, 그 때문에 종종 음원 사이트에 업로드 되지 않은 음반의 파일을 찾는 것만이 유일한 청취 방법이었으며, 공연은 후에 재결성하여 다시 활동했을 때만 드물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글에서 분류한 것과는 약간 다르게 실제 활동할 당시에는 밴드들이 스스로를 포스트록, 혹은 슈게이징 밴드라고 명명하고 활동한 경우는 적기도 하고, 음반 외의 다른 환경에서 활동했던 기록들은 반영을 못한 것도 있었는데 이 점이 언제나 아쉬웠다.

 그러나 2000년대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있었던 음악과 밴드를 한데 묶어 정리하고 그 흐름들을 재구성하며 그럴싸한 이야기를 다시 만든 것이 나 스스로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나에게 있어 노스탤지어는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아서〉를 썼던 과정처럼 지나간 일들을 관측하며 이야기를 만들거나 재구성하려 할 때 많이 느껴지는 감정이다.

  BOKEH가 골라본 작품인 〈고양이를 부탁해〉도 비슷한 면이 있다. 세기말에서 세기초, 그리고 인천. 나는 겪어보지 못한 시대와 장소를 다루고 있지만 그 속의 이야기들을 읽고 재구성하며 노스탤지어를 느낀다. 국내에서도 <릴리 슈슈>가 보다 디테일한 요소들에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전반적으로 유사한 사회적 분위기도 있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공연 문화를 향유하면서, 또는 청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공론장인 SNS나 커뮤니티를 사용하며 동시적으로 느끼는 한국 인디씬만의 에테르도 분명히 존재하지 않나.

원영  그렇다. 먼저 2010년대 중후반부터 온라인에서 좋다는 소문이 웅성웅성 퍼지다가 갑자기 큰 인기를 끌며 확 주류 방송까지 떠올랐던 혁오, 새소년, 실리카겔 같은 밴드들이 생각난다. 위의 팀들 모두 과거의 경우와 달리 인터넷 안에서 분명한 팬덤이 뭉치고 커지면서 밴드의 위치도 같이 견고해지는 점이 재미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일 좋아하며 흥미롭다 생각하는 팀이 전자양인데, 그 온라인의 흐름을 정말 재밌게 탄 것 같다. 2001년 원맨 밴드 시절 홈 레코딩을 통해 나온 1집 〈Day Is Far Too Long〉은 발매되고 정말 좋은 평을 받았는데, 2010년대로 들어서며 지금의 멤버 구성으로 탈바꿈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 않나. 2000년대 당시의 원맨 밴드/홈 레코딩 프로젝트와 비교해 보면 이만큼의 지속력이 정말 유일무이하다는 느낌이다. 지금 10대 후반, 20대 초반인 청자들이 전자양의 초기 작품들을 듣고, 그 음악에 빠져 팬덤을 꾸리고, 자신들의 컬트적인 문화를 만들어내는 점이 흥미로웠다. 전자양도 온라인 상에서 팬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며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고, 오히려 홈 레코딩 시절의 2000년대 당시보다도 현 시점에 이렇게 가시적이고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는 것이 인상적이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온라인 내의 커뮤니티 문화가 크게 만들어지면서 그 안에서 활동하던 뮤지션들은 늘 다음 단계인 오프라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거쳤다면, 201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굳이 온라인 활동을 벗어나 오프라인을 주무대로 삼는다고 선언하지 않고 양쪽에 발을 디딘 채로 활동하는 팀들이 많아진 것 같다.

음악에서 느끼는 에테르를 서로 공유했을 때, 비슷한 음악을 고르면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이 느껴지고 왠지 모르게 중첩된 정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개인적이기 때문에 서로 비슷한 분위기나 장르의 음악만 추려지지 않았다. 상반되는 음악들도 나왔고. 그럴 때 아주 가까워지며 또 아주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웃음).

원영  나에게 ‘에테르’는 취약한 감정들, 위태로운 감정들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음악적인 요소들을 활용하여 그 감정을 극단적으로 잘 쏟아내는 순간에 느껴진다. 그냥 슬픈 것을 넘어서 내가 슬프다고 대놓고 말해버릴 때 더 슬퍼지는 순간이 있지 않나.

에테르가 느껴지는 음악인들을 생각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는데, 일단 〈릴리 슈슈〉를 바탕으로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푸른새벽이었다.

 최근에 오미일곱의 음반도 듣고, 개인 블로그에서 따로 말씀하신 걸 읽어 보며 한 생각인데, 2000년대 한국에서 우리가 슈게이징이나 드림 팝이라고 생각했던 장르가 다르게 보자면 슬로코어가 아니었을까 싶다. 쓰루 더 슬로, 트레몰로, 탁류한 같은 밴드부터 시작해 조금 더 비약하면 데이슬리퍼, 라비앙 로즈 같은 밴드들이 나름의 분위기와 흐름을 형성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음악적 흐름의 대표적인 주자가 푸른 새벽이지 않았나. 한 번 톡 건드리면 다 깨질 것 같은 정서적인 취약함을 음향으로 잘 구현하고 있는 팀이고, 특히 푸른 새벽의 1집 〈Bluedawn〉은 기타의 깨질 것 같은 톤이나 종종 삽입되는 잡음들과 더불어 보컬 한희정의 목소리에 ‘에테르’가 느껴질 만한 떨림이 있다.

 정반대의 방향으로 ‘에테르’가 느껴지는 팀은 할로우 잰. 조용하게 찰랑이는 기타에 흥얼거리고 중얼거리는 푸른 새벽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강렬한 슬라이드와 함께 곡이 시작하자마자 “영원!”이라고 울부짖는 난폭한 언클린 보컬이 위태롭고 취약하고 무너질 것 같은 감정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에테르’가 느껴지는 것 같다. 이건 소위 말하는 ‘지르는’ 음악으로 감정 해소를 하는 개인적인 취향에서 오는 추천이기도 하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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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아오키서점 》

세 번째 이야기

그날은 집으로 돌아가 『쥬얼』을 밤새 들었어요. 만약 에테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제가 흘린 눈물의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

소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발췌


  BOKEH의 독자들에게 간단한 소개를 부탁 드린다.

아오키서점(이하 ‘아오키’) 이와이 슌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소설을 번역 및 출판한 아오키서점의 대표이자 이와이 슌지 감독과 릴리 슈슈의 팬인 ‘아오키’이다. 방금 대표라고 소개했는데, 사실 직원이 두 명이라 의미 없는 타이틀이다(웃음). 나와 ‘돌’이 처음 기획한 아오키서점의 테마는 일본 작품을 중점적으로 큐레이션 해서 번역/출판을 하는 출판사다. 국내 상업출판 시장에서 나오기 어렵지만 확고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작가들의 작품들이나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책을 소개하고 싶어서 시작하게 되었다.

 원작에서도 ‘에테르’에 대해 정의하는 행위 자체에 반발심을 가지는 인물들이 나오고, 특히 이 작품을 좋아하는 팬들이 실제로 <릴리 슈슈> 속 팬들처럼 종교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다. 혹시나 실언을 해버려서 너 때문에 ‘에테르’가 더러워졌잖아, 이런 말을 들을까 봐(웃음). 내가 하는 말이 과잉대표화 되는 걸 원치도 않고. 하지만 나랑 비슷한 사람을 발견하는 건 반가운 일이니까. 단지 <릴리 슈슈>를 좋아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앞으로 할 이야기를 가볍게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소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상욱  <릴리 슈슈> 원작 소설의 번역 및 출간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하다.

아오키 2019년부터 작업을 시작한 것 같은데 처음부터 출간할 생각으로 번역한 건 아니다. '이와이 슌지의 다른 작품들은 다 국내 정발이 됐는데 <릴리 슈슈>는 왜 아직도 번역이 안됐지?' 하는 의문을 평소에도 갖고 있었다. 단지 취미 같은 느낌으로 일본어 공부도 할 겸 내가 아끼는 이 작품을 한글로 읽고 싶어서 시작하게 됐다. 블로그에 잠깐 올려보기도 하고. 그런데 번역을 완성 했더니 동업자 돌이가 번역해 놓은 게 너무 아까우니 출간을 하는 방향으로 제안을 했다. 그래서 그동안 이와이 슌지 작품을 출간한 에이전시를 통해서 정식으로 판권을 산 뒤 출간하게 됐다.


호흡하는 아라베스크

릴리 슈슈의 앨범 <호흡>과 CD 플레이어. (사진제공: 아오키서점)

아오키  나원영 님께서는 영화를 처음 보시자마자 ‘에테르’라는 심상을 자기 안에서 정리하셨다는 것이 나로서는 좀 질투가 났다. 나는 <릴리 슈슈>를 2016년에 처음 본 것 같은데, 그 때는 이해를 못했었다. 막연하게 음악과 영상이 좋다, 정도의 감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두 번째로 볼 때부터는 놓쳤던 것들이 들어오면서 그 영화가 담고 있는 거대한 메시지 같은 것까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점들을 발견하는 일이 재미있어서 지금까지 8번 정도 본 것 같다.

상욱  나도 두 번 봤을 때부터 이해가 됐었던 것 같다.

  이 영화만의 특이한 점이라면, 영화에서 ‘릴리 슈슈’로 등장하는 Salyu가 릴리 슈슈의 이름으로 음반을 내고 또 공연도 한다.

아오키  그런 부분이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할 이유를 계속 만들어주는 느낌이다. 영화가 영화 자체로 끝나버린 게 아니라 영원히 남아 있는 거고 그 자체로 살아가는 거니까.

  <릴리 슈슈>가 보여주는 잔혹한 서사와 연출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지 않나. 폭력적인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거나, 영화가 남성의 자기 연민에 불과한 불쾌함으로 점철되었다는 부분이 이 영화에 대해 많이 비판하는 지점인 것 같다.

아오키  맞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세상이 죽으라고 떠미는 것처럼 암울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쿠노는 자기 머리를 삭발하고 스스로 본인이 처한 위기로부터 벗어난다. 만약 쿠노의 죽음으로 영화가 끝나버렸다면 나도 앞서 말한 비판들과 똑같이 생각했을 것 같다. 피해자였던 인물이 가해자 위치에 자리하게 되는 위계적 모순의 재생산에 대한 자기연민을 전시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간이 지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토록 좋아하던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를 피아노로 연주하는 쿠노의 상처는 머리카락처럼 어느새 다시 재생되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학생이 겪기에는 너무나도 잔혹한 사건들을, 이와이 슌지는 비유적인 연출을 택하지 않고 관객에게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릴리 슈슈> 속 등장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이 불러일으키는 불편한 감정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누군가에겐 피할 수 없는 삶이며, 그 주체는 현실에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서사를 통해야만 더욱 와 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아이러니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이와이 슌지는 작품 속에서 비극적 실존주의가 필요한 이유를 설득시켜준다.

  그런 맥락에서 소설과 영화의 가장 크게 다른 점이 영화는 쿠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오키: 앞서 언급했듯 실존주의적인 메시지로 진화했다. 영화화 되면서 좀 더 나은 방향, 그리고 모두에게 필요한 이야기로 변했다. 원작 소설은 결말 부분도 그렇고 영화보다 훨씬 더 허무하고 미래가 없는 것처럼 암울하다. <릴리 슈슈>를 보다보면 어째서 우리는 굳이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계속 살아야 하는 건지 묻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해 영화의 엔딩 크레딧 장면에서 이와이 슌지의 두 문장으로 압축한 대답이 등장한다. '인간의 가장 큰 상처는 존재'. 결국 우리는 처음부터 상처 입기 위해 태어났고 태어난 이상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된다는 메시지를 2시간 38분 동안 그런 끔찍한 상황들을 보여주면서 전하고 있다.

상욱   원작 소설은 전개 방식이나 구성 면에서도 굉장히 독특하지 않나.

아오키: 맞다. 영화에서 인물들이 릴리 슈슈의 팬클럽인 릴리필리아의 인터넷 게시판에 투고하는 연출처럼 모든 단락이 게시판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또한 초반에는 추리소설처럼 전개 되어 영화를 먼저 보면 내가 알던 영화의 원작 소설이 맞나 싶을 정도고, 영화의 도입부가 소설에서는 중반에서야 나오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고 한 번에 이해할 수 없었던 그런 감정선, 인과관계 같은 것들이 소설에는 보다 잘 설명이 되어 있다. 만약 영화를 보고 이해를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소설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 드린다. 그리고 나서 영화를 다시 보면 영화가 훨씬 더 좋게 느껴질 것이다.


공명으로 회복하는 상처

상욱  아오키서점에게 ‘에테르’란 무엇인지 묻고 싶다.

아오키 원작의 도입부에서 ‘에테르’는 빛을 매개로 하여 믿어져온 물질이라고 설명을 한다. ‘에테르’란 설명이 불가능한, 신비롭고 어딘가 종교적인 이미지가 강한 심상인 것 같다. 그래서 비슷한 맥락으로 ‘비상구’라는 키워드가 생각난다. 작품 내에서의 릴리 슈슈의 음악이나 또 등장인물들이 팬 사이트 릴리필리아를 통해 함께 나누는 대화들이 그들에겐 비상구의 역할을 하는 것인데, 이처럼 삶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누구나 자신만의 비상구가 있어야만 한다. 잠시나마 현실로부터 도피를 하게 해주는 마법 같은 순간. ‘에테르’를 ‘만났다’는 느낌.

  단순히 작품 자체의 완성도보다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나와 만났는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아오키  그런 점에 있어 원작에서도 등장하는 ‘에테르의 공시성’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른다. 그리고 거대한 담론일수록 ‘에테르’를 느끼기가 힘들고, 사소하고 개인적인 경험이나 이야기에서 몰입이 잘 되는 편이다. 그래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작품이 안고 있는 상처와 내가 공명을 할 수 있는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연약하지만 그와 동시에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에 ‘에테르’를 느끼는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이랑<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를 좋아한다. 당장이라도 자살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필사적으로 살아보려고 하며 발버둥치는 듯한 느낌. 영화의 결말에서 쿠노가 머리를 삭발하고 나타나 좋아하던 아라베스크를 연주하는 장면처럼, 그런 힘이 있다.

 하지만 꼭 가사가 있어야 '에테르'를 느끼는 건 아닌 것 같다. paionia<夜に悲しくなる僕ら(밤이 되면 슬퍼지는 우리들)>이라는 곡의 후반부 연주 부분에서 폭발할 것 같은 생명력이 느껴지는데 거기서 묻어 나오는 슬픔으로부터 커다란 ‘에테르’를 느낀다. 영화의 사운드 트랙에서도 ‘에테르’가 많이 느껴지는 것 같다. 소노 시온 감독의 <노리코의 식탁> 사운드 트랙인 <Lemon Song> 같은 경우는 그 노래에 대한 추억이 없는데도 놀이동산에 온 것 같은 노스탤지어가 느껴져서 좋아한다.

  폐장한 놀이동산의 감성을 정말 좋아한다(웃음). <Take me with>처럼. 가사도 너무 우울하다. ‘모두가 그렇듯 너도 떠나는구나’...

아오키  맞다. 나도 그 노래를 엄청 좋아하는데 폐장한 놀이동산에서 나는 심지어 길을 잃은 듯한 암울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Shinsei Kamattechan (신세이 카맛테짱)<さわやかな朝 (상쾌한 아침)>이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나원영 님께서 할로우 잰을 언급하시며 설명한 감상이 내가 신세이 카맛테짱의 음악을 들으며 '에테르'를 느꼈던 것과 유사했다. <릴리 슈슈> 속의 인물들이 릴리 슈슈의 노래를 공황장애의 증상이 나타날 때 약 먹듯이 소비하는 묘사가 있는데, 내가 신세이 카맛테짱의 음악을 찾아 들어야만 하는 순간이랑 비슷한 것 같다. 제목은 상쾌한 아침이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보컬 노코의 마음은 전혀 상쾌해 보이지 않고, 어딘가 잘못된 것 같은 분위기로 비명에 가까운 노래로 표출한다.


그 곳에 하얀 글라이드를 띄우자

아오키  또 <릴리 슈슈>만큼 정말 많은 위로를 받은 두 영화가 있는데 우선 카호, 심은경 주연인 하코타 유코 감독의 <블루 아워>. 마지막 장면에서 카호의 일그러진 얼굴을 정말 좋아한다. 그리고 하시구치 료스케 감독의 <해변의 신밧드>가 생각난다. 사실 영화 자체는 <릴리 슈슈>에 비해 전혀 우울하지도 않고 여름의 방황하는 청춘들이라는 소재 말고는 유사한 점도 없지만, 이 영화의 몇 가지 특정한 장면들이 내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나의 상처와 커다랗게 공명했던 부분이 소중했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에서 비슷하게 ‘에테르’를 느꼈던 부분이 있었다. 주인공 은희가 계속 답답할 정도로 말을 안 하고 오빠한테 맞아도 그냥 참는 캐릭터인데 가족들에게 갑자기 나 성격 안 나쁘다고 엄청 소리를 지르는 장면. 그 부분에서 공명을 느꼈다. 개개인마다 ‘에테르’가 느끼는 지점이 너무 다르고, 또 다르지만 가끔씩 겹쳐지는 부분에서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아주 의외인 작품이 나올 때마다 흥미로운 것 같다.

아오키  노스탤지어나 상처는 개인적인 감정이니까. 이런 거에 ‘에테르’를 느껴? 싶은 거에도 나는 에테르를 느끼는 편이다. 예를 들어 캬리 파뮤파뮤 (Kyary Pamyu Pamyu)<きみのみかた(너의 편)>, AKB48< 希望的リフレイン(희망적 리프레인)>처럼 밝고 희망찬 노래를 들으면서도 에테르를 느낄 때가 많다.

상욱  에테르’라는 것이 개인적인 감정과 기억에서 많이 기인한다고 말했는데, 그러다보니 다들 한 번쯤은 상처 받았을만한 보편적인 순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에테르’를 느낀다. 그러나 좀 더 디테일하게 이야기할수록 그 사람의 깊은 부분들을 보는 것 같아 남을 더 알아간다는 점에서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아오키  맞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릴리 슈슈>의 한 장면이 생각나는데 공연장 앞에서 릴리의 팬들끼리 너는 무슨 노래를 제일 좋아하냐고 하면서 싸우지 않나. 되게 좋아하는 장면이다. ‘에테르’를 발견하는 순간은 모두에게 다 다르지만 느끼는 마음 자체는 비슷하지 않을까. 각자 안고 있는 내상을 서로에게 보여주기도 하고, 이러한 내상의 공유를 경험하면서 우리의 상처도 마모되어 가니까. 이러한 존재의 고유한 특성을 이와이 슌지는 릴리 슈슈의 입을 통해 ‘회복하는 상처’라 부른다.


추신. 아오키서점이 추천하는 음악들

日高理樹(리키 히다카)<不良たちの描いた夢は(불량배들이 꾸는 꿈)>. betcover!!, GOD, MINAMI Deutsch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리스트가 솔로로 낸 노래다. 기타 연주로만 되어 있는 곡인데 아까 언급했던 폐장한 놀이동산의 느낌이 나서 좋아한다. 또 제목이 불량배들이 꾸는 꿈인데, 불량배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와 상반되는 따뜻하고 낭만적인 이미지가 주는 모순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릴리 슈슈>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며 동시에 릴리 슈슈의 팬이었던 호시노도 생각이 나면서.

추가적으로 betcover!! 노래 중에서 <ポポ(포포)>. 곡 시작 부분의 아르페지오 연주와 ‘내가 네 곁에 있어도 될까?’라는 소절에서 소중한 것을 대하는 조심스러운 마음과 전체적인 가사가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고 노래가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폭발하는 연주가 마치 불꽃놀이처럼 너무 어떤 한 순간을 위해 빛나는 듯 한 인상을 줘서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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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에테르를 찾아서]를 마치며

낙관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거나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 에테르 특집을 기획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언할 수 있는 건 비상구 유도등은 언제나 밝게 빛난다는 것. 결국 우리가 ‘에테르’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호흡!’나는 소리 내어본다.
살아 있어! 살아 있어!
같은 하늘 아래 릴리 슈슈는 살아 있어.
같은 공기를 마시고 뱉으면서 릴리 슈슈는 살아 있어.
나도 살아 있어.

소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발췌